박원순 서울시장 고향 창녕에서 '토크 콘서트'열어!

최성룡기자 | 기사입력 2018/11/25 [09:04]

박원순 서울시장 고향 창녕에서 '토크 콘서트'열어!

최성룡기자 | 입력 : 2018/11/25 [09:04]

 

▲ 박원순 서울시장 고향 창녕에서 '토크 콘서트'열어!     © 편집국

 

더불어민주당 밀양의령함안창녕지역위원회(위원장 조성환)는 지난 11월 24일 오후 5시 30분 창녕경화회관에서 박원순 시장 초청 토크 콘서트'는 김태랑 고문 그리고 민주당 밀양'의령'함안'창녕지역위원회 여성위원회.박원순펜클럽 회원들과 더불어민주당 당원 그리고 지역민들이 대거 참석한가운데 가졌다.

 

▲ 박원순 서울시장 고향 창녕에서 '토크 콘서트'열어!     © 편집국

 

박원순 서울시장은 고향 창녕을 찾은 것은 고향분들에게 행복을 주기위한 소중한 선물 칭찬을 주기위해 고향을 찾았다.고 말문을 열었다.시민운동가 출신으로 협력과 상생을 강조하며 시정을 펼치고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고향 창녕을 찾은 이유는 선물을 주기위함이다,그건 바로 칭찬이다 아이는물론,직장에서도 부하직원들에게도 무조건 칭찬하라.고 강조했다. 

 

▲ 박원순 서울시장 고향 창녕에서 '토크 콘서트'열어!     © 편집국

 

군 사장단을 만난자리에서도 칭찬이야기를 나눴다.개인적인 문제에 있어서,서울시 택시기사에게 물어보니 박원순시장 칭찬하는ㆍ기사들이 많았는데 정략 자신은 택시기사들에게 욕을 많이 듣는다. 그런데 박 시장은 택시기사에게 욕을 많이 먹는데  자신에게 칭찬하는 기사가 있다고 하니 예외다.

 

▲ 박원순 서울시장 고향 창녕에서 '토크 콘서트'열어!     © 편집국

 

박원순은어떤 사람인가.? 경남 창녕의 가난한 농가에서 부친 박길보씨의 2남 5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1969년 7월 당시 13살인 박원순은 일제강점기 사할린에서 실종된 작은할아버지의 양손으로 입양됐다.1982년 강난희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박주신) 1녀(박다인)를 두었다. 강씨는 1999년 인테리어회사 ’P&P디자인‘을 설립했다. 한 때 대기업의 일을 수주할 정도로 규모를 키웠으나 지금은 사세가 위축돼 직원 7~8명 수준의 작은 회사로 운영되고 있다.

▲ 박원순 서울시장 고향 창녕에서 '토크 콘서트'열어!     © 편집국


경상남도 창녕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1974년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1975년 재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합격했다.1975년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서울대에서 제적됐다.1979년 유신체제 종식에 따라 이듬해 각 대학의 제적생 복교조치가 내려졌으나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 1985년 2월 졸업했다.1991년 8월 런던정경대 국제법과정(LSE)에서 1년간 수학해 디플로마를 취득했다.이후 1978년 8월부터 8개월간 고향에서 보충역으로 복무해 병역의무를 마쳤다.

▲ 박원순 서울시장 고향 창녕에서 '토크 콘서트'열어!     © 편집국


시민운동가로서 활동하는 동안 1998년 한국여성단체연합 제10회 올해의 여성운동상, 2002년 서울지방변호사회의 공익봉사상, 2003년 시민의 신문 올해의 상과 희망 이웃돕기 유공자 포상식 국민포장을 수상했다.2006년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정신을 기리는 제10회 만해대상 실천부문에서,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부문에서 각각 수상했다. 2009년 불교인권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불교인권상을 받았다.학술분야에서 저술활동도 인정받아 2002년 제15회 심산상, 2007년 제21회 단재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 박원순 서울시장 고향 창녕에서 '토크 콘서트'열어!     © 편집국

 

창녕경화회관에서 박원순 시장 초청 토크에서 사회자의 질문에 사심없는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박원순은 1956년 3월 26일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났다.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했으나 긴급조치 명령 9호 위반으로 제적당했다.1979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고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구지검 검사를 거쳐 1983년 변호사로 개업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1995년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사회운동가로 전업.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상임공동집행위원장.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등 새로운 시민단체를 창립해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시민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싹을 티웠다.

 

당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하자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안철수와 단일화에 성공하고 민주당 및 민주노동당 후보와 경선에서 승리해 무소속으로 범야권 단일후보가 됐다.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고 경상도 창녕출신이 서울시장이 되는 이변을 나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 서울시장 야권 후보로 출마해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에 이겨 재선에 성공했다.박근혜 게이트로 조기대선이 가시화하자 19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나설 뜻을 보였으나 결국  불출마 선언을 하고 서울시정에 주력하고 있다. 소탈하고 성실한 성품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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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10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 만나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사업 등에 공감하며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문 후보는 서울시와 촛불 시민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사법연수원 동기이기도 하다.문 후보는 서울시 부시장을 지낸 임종석 전 의원을 선거운동 캠프에 영입한 데 이어 하승창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영입하는 등 ‘박원순맨’을 대거 캠프에 영입했다.2017년 3월 사드보복에 따른 중국인 한국 여행금지 조치에 대처하는 데 주력했다. 무슬림 관광객을 위한 할랄 음식점 홍보를 강화하고 일본 여행사와 업무협약을 맺는 등 서울 관광객 다변화에 힘썼다.


2016년 1월28일 종로구 세운상가 일대를 재개발하는 내용의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우려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심에 가까운 낙후 지역에 고급 상업 및 주거지역이 새로 형성되면서 원래의 거주자들은 다른 지역으로 쫓겨나게 되는 현상이다.2017년 3월2일 세운상가 일대를 재생하는 ‘다시·세운 프로젝트 창의제조산업 활성화 계획’을 발표했다.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전략기관 입주 공간, 청년 창업사와 제조사 입주 공간, 시민문화공간 등 3단계로 진행하기로 하면서 종로 세운상가 재생계획을 추진했다.


2017년 2월13일 서울시에 비정규직과 영세사업장 근로자, 아르바이트 등 ‘을’의 경제주권을 강화하는 23개 과제를 담아 2017 경제민주화도시 서울 기본계획을 마련하고 이를 발표했다.이랜드의 비정규직 임금 미지급이 이번 경제주권 강화안 마련의 계기가 됐다.2017년 1월26일 2017년 19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더불어민주당 안에서 경선규칙이 확정된 뒤 예비후보 등록을 시작하면서 나온 불출마 결정인 만큼 정치권은 경선판도와 다른 주자들에게 미칠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시장으로서 시정에 집중하면서 더불어민주당 당원으로서 정권교체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박원순 시장은 택시기사들에게 욕을 많이 듣는 이유는 2017년 1월29일 서울역 고가를 4월22일에 개방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2014년 9월 서울역 고가를 미국의 뉴욕 하이라인파크에 버금가는 도심고가 녹지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발표했다. 2014년 11월24일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집회를 열어 고가를 공원화해서 도로가 끊기게 되면 퇴계로와 중림동 사이의 이동시간이 30분 이상 늘어나게 돼 남대문시장과 중림동이 도심 속의 섬이 된다며 이를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2015년 8월21일 서울역 고가를 5개 빌딩과 보행길로 연결하기 위해 건물 대표들과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차량길'에서 '사람길'로 재생한다는 '서울역7017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7개 사람길 조성의 첫단추였다. 2015년 12월13일 1970년 산업화시대 서울역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을 잇는 자동차 전용도로인 서울역 고가를 폐쇄했다.

 

고가에 공원을 건설하는 계획을 두고 만리재로나 염천로로 우회해야해 교통체증이 심해질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과 공원이 완성되면 남대문시장이 활성화 될 것이라며 찬성하는 의견이 모두 나왔다.하지만 2016년 3월 보수보강공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공원화 사업이라는 목적에 맞게 고가 위에는 카페와 도서관, 야외무대, 꽃집 등 20여 개 편의시설 등이 조성돼 공중휴식처 역할을 하도록 만들 계획을 세웠다.

 

2015년 10월에 이어 2016년 3월 일자리 대장정 시즌2 시작을 발표했다. 서울 전역에 취업준비 전반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자리카페 300개를 2020년까지 세우고 강소기업 1천 개를 발굴해 청년 1만 명을 취업시키며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 청년의 권리보호를 위한 물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로 했다.

 

2015년 7월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를 위한 임대주택 모델인 ‘서울리츠’를 개발해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시는 리츠방식의 임대주택을 처음 도입했는데 LH공사가 10년간 임대주택으로 공급한 뒤 일반분양으로 전환하는 방식인 데 반해 ‘서울리츠’는 50년 이상 장기 임대주택으로 공급해 주거안정성을 최대화했다.

 

경제분야 핵심공약으로 ‘서울형 창조경제’를 내밀었다. 구로의 가산과 홍대의 합정, 상압의 수색, 동대문, 개포를 5대 창조경제 거점으로 키우고 코엑스에서 잠실에 이르는 영동권과 도심, 서남권 등 3대 권역을 국제교류 마이스(MICE) 복합거점으로 육성할 것을 약속했다.

 

2014년 10월15일 세계 첫 수상컨벤션 시설인 ‘세빛섬’을 개장했다. 2009년 9월 공사를 시작해 2011년 9월 준공된 이 사업은 특혜시비 등의 문제로 전면개장이 미뤄져오다가 최대출자자인 효성과 운영정상화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선거에서 선거자금이 부족했던 박원순은 2010년 6•2 지방선거 당시 국민참여당 대표 유시민이 경기지사 후보로 나서면서 활용했던 ‘유시민 펀드’를 모방해 '박원순 펀드'를 발행했다.
 
 '박원순 펀드’는 모금 하루 만에 목표액인 33억 원을 넘기며 52시간 만에 조기마감되었다. 모금된 펀드는 선거자금으로 쓰고 12월 25일 이전에 원금과 이자(연리 3.58%)를 투자자들에게 돌려줬다. 최종 입금액은 38억8500만원이며 입금에 참여한 시민들은 모두 5778명이었다. 1인당 평균 67만 원을 낸 셈이며 시간 당 모금액은 6300여 만원이었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어떤 사건이든지 한번 맡게 되면 끝을 보는 성실한 성격 때문에 좋은 평판을 얻었던 시절도 있었다.

 

뉴타운 출구전략과 용산국제업무지구 등에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2013년 노량진 배수지 수몰사고와 방화대교 진입로 붕괴사고 등 악재가 잇따랐지만 수습과정에서 기민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메르스 사태 대처도 호평을 받았다. 끊임없는 소통을 중시해 '시민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시장'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반면 새누리당 김성태의원과 뉴데일리로부터 전임시장 오세훈이 하던 전시행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인기위주의 정책들을 내놓는다는 비판을 받았다.서울시장 재선에 출마하며 ‘세월호 참사’를 의식해 유세차와 세력동원, 네거티브 등 세 가지를 하지 않는 ‘3무(無) 선거’를 약속했다. 하지만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와 토론회에서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나경원 후보의 ‘피부과 1억 원’을 들며 공격하기도 했다.

 

1979년 장충식 당시 단국대 총장이 신원보증을 서 줘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데모로 복역한 학생을 받아주는 대학은 없었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장충식 총장은 박원순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투옥된 경력이 있음에도 운좋게 검사로 임용됐지만 6개월 만에 사표를 썼고, 6개월 뒤 검찰을 떠났다. 그는 '사람 잡아넣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은 데다 폭탄주 등 강압적 조직문화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박원순을 시민운동가의 길로 인도한 것도 조영래 변호사였다. 1990년 12월 조영래 변호사는 임종 직전 “박 변호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제 좀 눈을 돌려봐”라고 박원순에게 조언을 건넸다. 박원순은 다음해 8월 집을 팔아 역사문제연구소에 기부하고 영국유학을 떠났다.  `돈 되는 사건'도 맡아 "돈을 꽤 잘 벌었다"고 한다.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재정적으로 큰 기여를 했다.그는 성공한 변호사로서 삶을 버리고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사회자의 질문에 서울시장 옷 벗을면 다시 변호사 시절로 돌아 가지 못할것 같다고 웃으며 털어 놓았다. 최성룡기자

 

정론직필의 자세로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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