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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NGO단체)“한국자살예방시민연대” 박세준 회장

최성룡기자 | 기사입력 2022/12/11 [09:28]

인터뷰 (NGO단체)“한국자살예방시민연대” 박세준 회장

최성룡기자 | 입력 : 2022/12/11 [09:28]

▲ 인터뷰 (NGO단체)“한국자살예방시민연대” 박세준 회장  © 편집국

 

단체 회장 : 박세준 회장
주요 경력 : 민주당 당대표 비서실장
            민주당 인천 남동(갑) 지역위원장
            한국방송신문연합회 회장
            일자리방송 사장
 
1. 단체가 만들어진 계기(사연)

 저는 1962년 인천 서구(김포군 금단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곳은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이었어요. 불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후 6시만 되면 땅거미가 지는 그런 세상에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제가 태어난 집안은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굉장히 낙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다른 집은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아 남폿불을 사용했는데, 저희 집 만큼은 발전기를 들여와 전기를 사용했으니 남들에 비해 가정 형편은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2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 몸이 아파 한 동안 병원신세를 졌습니다.


그래서 인지 부모님께서 저를 귀하게 대해 주셨죠. 친구들과 벌판에서 공도 차고 뛰어 놀고 싶었지만 몸이 아파 제대로 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활발하고 밝은 성격이라 운동은 좋아했습니다. 동네에서는 개구쟁이로 불렸으니까요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숨이 찰 만큼의 격한 운동은 할 수 없었습니다. 약한 몸 때문에 병원에도 자주 가야했거든요.
 유년시절을 공기 좋은 시골에서 자연을 벗 삼아 보내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해 경기고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힘든 도시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시골로 내려오게 되었죠.
작은 시골에서 초중고 시절을 모두 보냈습니다. 시골의 좋은 환경 덕분인지 아팠던 몸은 다행히 치료가 잘 돼 빠르게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87년에 민주당 박형오 의원(무안·신안) 비서를 했습니다. 27살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이를 계기로 정치에도 뜻을 품었고 많은 노력도 했습니다.
그러나 첫 직장에서 일에 대한 재미를 못 느끼고 오래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진정 원했던 일은 사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이 30, 사업으로 시작한 나의 청년기 박형오 의원의 비서로 일을 하고 있을 때인 1988년 결혼을 했습니다. 그 후 비서 일을 그만두고 이듬해 군복을 납품하는 무역사업을 시작했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려고 시장조사와 사회현황을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무역 비즈니스를 계획 했습니다.막상 시작해보니, 일이 점점 많아지고 사업도 발전이 있었죠. 그래서 사업을 더 키우고자 현지로 가게 됐습니다. 사업을 위해 저와 처, 아들과 함께 남아공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청년시절 저의 과감한 첫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남아공에서 진행한 사업도 진척이 되자 영역을 점점 더 넓혀, 현지에서 알게 된 국방부 장관(존 머디쉐)과 인연이 되어 사업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남아공에서 군복을 저렴한 원가로 구입해 다시 한국에 수출했습니다. 존 장관이 많은 도움을 주었죠. 주문이 쇄도하고 사세가 확장되자 직원도 보충했으며 30대 나이(90년대초)에 10억 정도 번 듯 합니다. 신흥재벌이었죠

사업의 몰락 흑인 폭동  남아공에서의 사업이 정점에 이르자 저는 또 다른 사업을 구상했습니다. 전구 무역입니다.
당시 전구가 남아공에서 비쌌습니다. 한국에서 전구가 100원이면 남아공에서는 1000원 하던 시절이었기에 아주 귀했죠.
 군복 납품 업을 과감히 접은 뒤 있는 전 재산에 빚까지 보태 현금 12억을 만들었죠. 그리고 한국의 전구를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구는 무게가 얼마 안 됩니다. 그러나 부피가 큰 단점이 있습니다. 깨질 염려도 있어서 컨테이너를 많이 동원해 한국에서 전구를 수입했죠. 모든 재산을 다 걸고 말입니다. 전구를 수입해 남아공에서 하나 팔면 10배의 수입이 있기에 망설임 없는 결정을 한 것이죠.
 그런데 수입이후 보관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물량도 많고 부피도 커서 창고에 일단 쌓아 두었죠. 그러나 이게 화근이었습니다. 90년대 남아공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으로 창고에 쌓아둔 모든 전구들이 불에 탔습니다. 전 재산이 날아가 버렸죠.
 전구들은 모두 불에 그을리거나 상품가치가 없는 폐품이 돼버렸습니다. 누구도 탓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동안 고생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한 없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을 남아공에서 보내고 결국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돈 한 푼 없이 한국으로 왔습니다. 처자식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러나 자본금이 없어 일을(사업)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추스른 후 1995년에 장애인을 위한 복지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으며 1998년 IMF로 인해 또 한번 끝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정계 복귀와 다시 시작되는 큰 시련들

 이후 2000년에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하면서 저의 정치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당대표 비서실장으로 국회에 입성해 한화갑 전 대표를 보필했습니다. 지구당 위원장도 맡아 지역현안을 챙기면서 차분히 정치수업을 시작했죠.
 저는 민주주의와 공익이라는 가치를 위해 시민단체에서도 일을 했으며, 제가 할 수 있는 역량을 기반으로 공익을 위해 많은 일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또 다시 큰 시련이 또 닥쳐옵니다. 2008년 8월에 난 교통사고입니다. 장애인이 될 정도로 크게 다쳤죠. 병원신세를 꽤 오래지게 됐는데 2009년 상반기 내내 병원에 입원 했습니다. 퇴원 후 후유증으로 장출혈도 있었고 지금도 몸이 좀 불편 합니다
 시련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듬해 제 아내가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한 것입니다. 아내에게 무관심 했던 제 자신을 자책하며 힘든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 마음을 다잡고 2010년 지역구인 인천 서구에서 출마하게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했고 아내는 백혈병으로 입원한 상황에서도 저는 힘을 냈습니다. 가장으로서 아이들에게 당당함을 보이기 위해, 병상에 있는 아내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위해 아픈 몸과 지친 마음을 이끌고 출사표를 던진 것입니다
 제가 정치를 하면서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때는 정말 포기 할 만큼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도전은 결국 구민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도전했지만 행운은 끝내 제 편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낙선 후 제 주위를 돌아보니 아내의 힘겨운 투병생활을 지켜봐야 하는 슬픔과 낙선의 허탈함이 한 번에 몰려들어 결국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정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죠. 그 때는 우울증도 있었고, 옆에 제 손을 잡아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무심하더군요. 늦은 밤 정처 없이 홀로 떠돌아다니기도 했고 온갖 생각에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실을 생각해 극복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저 하나 믿고 지금까지 살아온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면 결코 해서(자살)는 안 될 일이었죠.

자신의 경험으로 설립한 한국자살예방시민연대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을 했는데, 주위 환경이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 갈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마음을 차분히 갖고 저를 위해, 가정을 위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한국자살예방시민연대’의 창립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쉽게 결정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2~3년 전부터 기획을 해오다 결정한 일입니다.
‘한국자살예방시민연대’는 생명존중을 기초로 ‘천지지간 만물지중 유인최귀(天地之間 萬物之中 惟人最貴)’라는 의미에 이념을 두고 설립했습니다.
‘천지 사이에 있는 만물의 무리 가운데에서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라는 뜻으로 몸소 느낀 경험을 통해 깨달은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2. 단체 활동하면서 보람된 순간, 좌절한 순간

 ‘대한민국 투신자살 1위 다리’라는 오명이 붙은 마포대교를 ‘생명의 다리’로 선포 하였을 때가 생각납니다. 다리 난간에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희망적 메시지를 하나씩 새기었고, 두 사람이 위로하는 모습을 담은 동상을 설치했습니다. 세상을 더 행복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 밟았던 큰 첫 발자국이었기에 지금 생각해도 기쁘고 보람된 순간이었습니다.
 자살예방이라는 것은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자살 전조증상이 있긴 하지만 얼굴에 ‘저 자살 할 거예요’ 라고 쓰여 있지도 않고, 발견해 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 이유로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자살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TV에서 어떤 유명인의 자살소식, 여전히 감소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높은 자살률 소식을 접할 때 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보다 갚진 것은 사람의 생명인데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는 아닌 가 봅니다.
 남들이 하는 것은 똑같이 해야 되고 더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학벌. 그리고 돈이 많아야만 행복하다고, 계속 남들과 비교하며 사는 우리 사회가 너무 그런 마음을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자살률은 끊임없이 올라갈 것이며 마음이 병들어있는 사회는 계속 이어 질 것입니다.
 

3. 앞으로 활동계획

 본 단체가 설립 된지 벌써 1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행복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껏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 문화조성 교육, 상담 및 캠페인
- 대상별 안전(청소년, 노인, 여성, 군인 등)에 대한 교육
- 트라우마 힐링, 인성, 인권 및 생명존중 전문강사 및 상담사 육성 교육사업
- 자살자 유가족 지원 프로그램 개발 및 보급
- 자살예방교육을 위한 평생교육원 설치 및 운영
- 청소년 안전(성폭력, 학교폭력, 자살, 왕따, 흡연) 문화조성 교육 및 캠페인
- 관련 국내외 단체와의 자살예방문화 교류
- 노인복지시설 설립, 운영 및 노인일자리 확대사업

등 다양한 자살예방을 위한 활동을 앞으로도 꾸준히 진행해 왔습니다.

 살기 좋은 대한민국, 희망찬 대한민국을 위해 자살을 예방하고자 사회단체를 설립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은 것입니다.
 

※ 본 단체는 보건복지부 산하 비영리민간단체 197호이며, 300개 단체가 연대하여 현재 전국 150개 지부를 운영하고 있는 시민단체이다.

정론직필의 자세로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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